유경희

박현주 전
2003.9.19-10.3 갤러리 인
월간 미술 11월호
전시 리뷰(미술 비평 유경희)

 
박현주는 르네상스 초기 성상화가 지니는 빛과 색채에 대한 시각적 경험에 천착, 이를 고스란히 밀도 있는 회화적 오브제로 형상화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러한 중세적 감성에 가까운 아이콘의 회화적 형식과 주제를 모티브로 삼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물질이 근원적 일자 로 회귀 혹은 상승하고자 한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을 끌어온 것에 가깝다.
외견상 작가의 작업은 물성을 특별히 강조한 모더니즘 혹은 미니멀리즘 회화의 형식주의적인 실험과 변별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정통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모든 가상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최대한의 시각적인 단순성을 유지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모호함에서 벗어나 통합적인 인상을 받게 하는데 비해 그녀의 회화적 오브제는 전통적인 회화적 수법을 견지하면서도 의도하지 않은 비의적 일류젼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예컨대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난뒤 색채론을 썼던 것처럼 그녀 역시 피렌체의 성 마르코 성당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를 보고 빛과 색채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고는 이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작업에 반영한다. 평면에 석고를 입히고 갈아내고 색을 칠하는 반복적인 행위와 사각의 측면에 금박을 덧칠하는 행위는 곧 재료와 기법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원초적 과정이다. 물론 이번 작품은 금박의 연마작업에 근간해 이를 투영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아크릴리라는 질료가 개입되지만 여전히 반복적인 회화적 유니트의 제작은 지속된다. 이런 회화적 반복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일차적으로 물질과 교감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명상으로 유도한다.
여기에서 나와 물질이라는 주제와 객체의 경계와 구분은 사라지고 더 이상 대립 구도가 아닌 서로 침투하고 융합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작가는 이를 무아 로 명명하며 참된 자아를 찾아나가는 일종의 반성적 행위로서의 자기부정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궁극적으로 삶에 필연적으로 달라붙는 예술가로서의 근원적인 불한, 허무, 좌절, 상처등을 치유하는 순간이다.
장소특정성의 작품이 그러하듯 박현주의 작품은 작가의 내면적인 몰입의 상태를 떠날 때 완성된다. 작가에게서 떨어져 나온 작품이 특정한 공간과 조명의 부가적인 도움으로 연극적인 미적 관조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작가도 예기치 못한 빛의 파노라마적 효과. 마치 스태인드 글라스가 미묘한 빛의 뉘앙스에 따라 전혀 상이한 효과를 창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치밀한 구성과 개념을 염두한 것이 아닌 이상 물질과 공간의 상호작용이 주는 시너지에 가깝다. 이를 테면 질료에 철저히 적응하고 준응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지난한 여정속에서 삶이라는 간단치 않은 화두를 지속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빛에 투사하고 상승시키려는 작가 특유의 속성에서 비롯된 보너스 같은 것이다. 어쩌면 물성의 실험 자체를 개념화하는 시대와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박현주의 작업 역시 어느 형식주의적인 작업들이 가지게 마련인 메시지의 부재 혹은 주제의 공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예컨대 영원, 자유, 평화라는 메시지의 보편성이 주는 추상적 공허함을 지울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방법론에 입각한 작품들이 지각기능을 확장시킴으로써 의식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라는 전제는 인정된다. 그렇지만 형식이 내용을 지속적으로 담보하는 예술의 미학적 기능은 여전히 미흡한 채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미술비평 유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