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작업에 관하여; 암시(暗示, allusion)

박현주 작업에 관하여; 암시(暗示, allusion)

작업은 “회화는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 그린다는 것은 대상, 빛, 본질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더불어 작가에게 삶의 의미는 작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회화의 문제에서 출발한 작가의 존재론적 사유는 지속적이다. 작업의 과정은 삶을 성찰하는 과정이며 삶의 의미가 녹아있다. 작업과 삶을 주체적으로 사유하며 전개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작가는 생의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을 작업에서 찾는다.

삶을 회의(懷疑)한다. 작가의 화면은 삶의 존재적 성찰로 ‘내면의 풀리지 않는 응어리’와 ‘막다른 골목에 선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리움을 시각화하고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변형된 생명체metamorphosis>를 1996년에 발표한다. 식물과 씨앗과 같은 변형된 생명체를 나타내던 검은 점은 선에서 면으로 확장한다. 작업의 재료인 흑연의 반사면은 성상화 연구에서 경험한 금박의 반사면과 닮아 있다. 작가는 두 반사면에서 환영의 시각적 효과와 빛 자체가 화면에 안에 있음을 확인한다. 반사 빛이 만든 미지의 시각적 환영을 바라보는 것은 매혹의 순간이다.  작가는 자신을 매혹하는 반사된 빛의 세계를 생명체 내부에 잠재된 생명 에너지의 암시(allusion)로 해석한다.

작가가 집중하는 빛의 반사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비잔틴 이콘(Icon)이나 르네상스 성상화(聖像畵)의 황금빛 배경은 천국의 영원성과 신성한 공간을 상징한다. 작가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의 감실(Tabernacle) 제단화 <리나이올리 성모자상Linaioli Madonna> 연구에서 금박기법을 체득한다. 금박기법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빛의 반사가 만드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금빛 아우라(aura)가 담긴 반사는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인 현상을 동반한다. 금박의 반사를 활용한 작업은 새로운 공간의 확장에 주목하며 설치작업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보는 거리, 각도, 조명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을 공간 안에 들어가 감상자가 다양한 시점에서 체험하기를 기대한다. 눈으로 읽는 것과 읽히지 않는 것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에 집중한다. 작가는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가진 빛의 물리적 현상 너머 그리고 표면의 물성 위에 부유하듯 흐르는 추상적인 것을 포착한다. 작업은 추상적이며 은유적인 아름다움과 존재 너머의 신비한 경험을 포함한 무한의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상화(聖像畵) 제작 연구를 심화한 작업 <빛으로부터Inner Light>은 자기성찰과 물성에 관한 표현을 동반한다. 성상화는 금박과 템페라로 화면을 나누어 제작한다. 두 기법의 경계는 무한의 신성과 유한의 인성, 금박의 물성과 회화의 평면성으로 조형의 독자적인 창작 방법론을 작가에게 제공한다. 화면 속에 경계를 이루는 금박의 물질성과 템페라의 채색은 박현주 작업의 열쇠이다. 작가의 조형세계는 평면과 입체, 물성과 상징성 그리고 반사와 환영의 관계를 파악하고 확장한다. <변형된 생명체>에서 유기적 생명체의 형상을 제거한 연작 <빛으로부터>는 회화의 ‘평면성(a plane surface)’과 ‘빛의 반사’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평면성과 빛의 반사를 하나의 주제로 다루며 ‘회화적 오브제Plane Object’라고 부른다. 회화의 평면성과 빛의 반사를 함께 표현한 독자적인 조형론을 펼친다. 전통적인 회화의 평면성을 해체하고 텅 빈 표면 앞에 작가는 자신을 돌아본다. 반사 빛이 사물의 표면에서 벗어나 만든 신비한 환영의 공간을 재현한다. 작업은 회화 안에서 물성을 다룬다. 육면체의 네 측면에 금박을 입힌 ‘회화적 오브제’는 놓이는 공간과 빛의 관계에 따라 가변적으로 작동한다. ‘회화적 오브제’는 빛을 받으면서 사물이 가지는 물성을 상실하고 평면화된다. 지지대와 바탕칠 그리고 물감층이 하나의 물질적인 구조로 미묘한 색다른 공간을 연출한다.

작가는 남산골로 작업실을 옮긴 후 숲길을 걷는다. 소나무와 더불어 다양한 나무의 기운을 받고 나무의 정령을 체감하며 명상한다. 작가는 개념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생각을 없애려고 한다. 작업의 태도는 명상의 태도와 닮아있다. 작가와 작품은 작업과정에서 주체와 객체로 서로 교차하며 만난다. 주체로서의 작가와 대상으로서 작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느 순간 하나 됨을 확인한다. 특히 금박으로 작업을 진행하던 과정은 시공간 속으로 주체와 객체가 녹아 사라짐을 체험한다. 인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지점에 박현주의 ‘회화적 오브제’가 자리한다. ‘회화적 오브제’는 회화의 평면이 창출하는 자아의 은유(metaphor)이다. 물성이 사라진 캔버스는 물질과 정신의 경계에서 ‘자아의 은유’를 상징하는 새로운 개체로 탈바꿈한다. 즉, 하나의 단위(unit)를 만든다. 몇 개의 단위로 구성된 ‘회화적 오브제’는 반복적으로 벽면에 설치된다.

작품은 자아의 투영이다. 작업은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거리에서 자기를 바로 보게 한다. 작가는 평면을 오브제로 만들어 대상화(objectify)한다. 오브제의 의미는 작가에게 객체이며 대상이다. 기존의 회화 작품을 지지대, 바탕칠 그리고 물감층이 하나의 물질적인 구조로 파악한다. 사각형 캔버스의 측면을 넓혀 육면체라는 구체적인 오브제로 변환하여 ‘회화적 오브제’를 만든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인 작가와 대상인 작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본다. 작가 자신과 작품을 대상화하는 과정은 세계가 전체로서 하나임을 인식하는 방편이다. 박현주의 작업은 작가와 대상 사이에 간극을 너머 일체화된 관계를 보여준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선 허물기이며 서로의 만남이다.

빛은 존재를 반사한다. 박현주의 작업은 물질 너머의 존재를 암시한다. ‘회화적 오브제’는 현실과 비현실, 물질과 정신, 주체와 객체의 불협화음에서 생명에너지가 가득한 조화를 소망한다. 빛의 반사를 담아 전체로서 하나인 조형의 세계를 기대하며 삶의 무게를 덜어줄 위로의 세계를 제안한다. 빛의 환영이 만든 아우라의 세계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함께 마주한다.

김대신(미술과 문화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