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신전, 영혼의 집

최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Choi Eunju

Chief Curator/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정확하게 10년 전인 2003년, 박현주는 동경예술대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계기로 본인의 수 년 간에 걸친 작업과 연구 성과를 담은 <Inner Light>라는 책을 발간했다. 작가가 직접 쓴 그 책의 서문에 짧지만 읽는 이들을 감동시키는 몇 문장이 있어 다음에 옮겨 적는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삶’은 내게 가장 절실한 문제로 다가 오고 있다.

작품과 논고의 테마를 이루는 ‘삶’ 속엔 생(生)과 사(死),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등의 상반되는 것들이 혼재되어 있어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이렇듯 불완전하고 불명료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중략) 그리고 마침내 화면 속에서 빛을 좇아가는 작업이

결국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 박현주의 작업이 아주 높은 예술적 수준이나 다른 작가들과 비교되는 확연한 참신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위의 언급에 주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 뉴욕, 동경을 거치면서 긴 시간 화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마치고 이제 막 예술가로서의 행보를 조심스럽게 내딛기 시작했던 당시 박현주의 모습을 상기해 본다면 그 진정성의 정도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가늠케 한다. 사실 위와 같은 자기 고백의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장 자기중심적인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조차 이러한 자기성찰의 기회는 의외로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각종 재료와 물질이 난무하는 시대, 작가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주제와 소재, 물질과 사물에 사로잡혀 작업의 관성대로 끌려 다니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과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술의 길, 예술가의 삶은 어렵다. 박현주는 일찌감치 신산한 삶이 가져다주는 슬픔, 절망, 고통 등 여러 부정적 요소들을 ‘빛’이라는 일관된 주제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고 극복해 나가는 작가로서의 솔직한 삶을 살아 왔다. 이런 작가의 노력은 이제 <빛의 신전(Temple of Light)>이라 명명된 조형적 공간 속에서 특별한 아우라를 발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박현주의 작업은 ‘빛’의 주제라는 큰 윤곽을 줄곧 유지해 왔지만 시기별로 각기 다른 조형성을 실험하면서 점점 더 해당 주제를 심화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Sprouting>은 일본 유학 초기인 1998년과 1999년 약 2년간 시도되었던 연작이다. 백아지 위에 연필을 사용하여 동그라미를 연이어 그려나간 드로잉적인 그림을 통해 작가는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연필의 흑연이라는 물질이 갖고 있는 광물 입자의 광택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흥미는 곧 ‘빛’의 주제를 자신의 작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물론 이 즈음에, 이 작가의 화력에서 항상 언급되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리나월리(Linaiuoli)성모자상>(1433-35) 모사 수업도 ‘빛’에 관한 작가의 관심을 천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상화를 모사하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템페라와 금박 기법을 아주 충실히 습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세속성에 반하는 신성한 ‘빛’의 표현에 눈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Inner Light>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10년간이나 지속되면서 박현주의 가장 대표적 연작이 되었다. 나무 패널로 제작된 직육면체나 정육면체의 표면을 물감과 금박을 사용해 도포하고 이를 수평과 수직의 기하학적 질서 속에 놓이게 하는 방식이 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빛의 흡수와 반사라는 물리적 성질을 극대화하였다. 2000년대 후반기에 작가는 <Beyond the Light> 연작(2008년~)에서 비비드한 색상을 원형과 직육면체의 구조물에 경쾌하게 얹어 본다든지, <Diagram of Light> 연작(2009년~)에서 컬러 도트(Dot)나 바(Bar)의 리드미컬한 배치를 시도해 본다든지, <Floting of Light>연작(2010년~)에서 색과 빛의 대비와 조화를 통해 공간에 파장을 일으키는 등의 시도를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과거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기반으로 이제 자신이 보다 과감한 화면 구성을 할 수 있음을 자신감 있게 보여주고자 한 듯하다. 점, 선, 면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종합되거나 이 조형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공간이 연출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이전에 사용한 바 없는 자주색과 청록색 같은 혼합색을 능란하게 사용하여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있다.

화면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금박으로 처리된 크고 작은 원형의 점들은 마치 인간 존재를 상징하는 것처럼 다정히 모여 있기도 하고, 홀로 떨어져 고독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겨루기를 하는 듯 팽팽히 맞서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손 내밀어 화해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공간을 탐색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 점들이 모래시계를 연상시키는 실루엣 속에 놓여 시간의 유한함을 상징하는 것도 같고 수평선과 수직선, 사선과 만나다보니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이 작가의 화면에 하나 둘 기둥이 생기고 계단이 만들어지고 지붕이 얹어지면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나 바벨탑, 혹은 불교사원일 수도 있는 건축적 형상들이 슬며시 드러나고 있다. 삶의 절실함을 체험한 인간의 염원이 반영된 신전의 형상이 이 작가의 작품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하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정의 뜻을 담아 <빛의 신전(Temple of Light)>라 명명한 이번 개인전을 통해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 삶에 동반되는 가치를 되새기고 있다. 그래서 이 신전은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고통과 치유, 완성과 미완성, 빛과 그림자, 성(聖)과 속(俗), 시간과 공간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영혼의 집이다.